무척산 기도원의 역사

by 관리자 posted Mar 20,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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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http://www.seonjija.net/new/board_XBwc74/40992

무척산 기도원을 회상하며

 

무척산기도원 사진1.jpg

 

무척산 기도원은 군에 입대하기 전에 올라가 보았고 또 군에서 제대 후에 올라가 보았다. 올라가 보았다고 표현하는 것은 무척산 기도원에 가려면 산 하나를 갈 ‘지(之)’ 자를 그리며 올라가야 하기 때문이다. 산 중간 정도인가 올라가면 길 바로 오른편에 절이 있었다. 그렇게 올라가서 기도원이 있는 꼭대기에 올라가면 먼저 보이는 것이 산꼭대기에 제법 큰 저수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좌편에 기도원이 있는데 제법 큰 돌로 쌓아져 있어서 특별하게 보였다.

 

기도원에 올라 갈 때는 간절히 기도할 제목이 있었고 또 기도원에 가면 누구나 거의 금식기도를 하였다. 그 당시 팔팔한 청년 때였으니까 사흘 금식하고 바로 밥을 먹었다. 반찬은 기도원 옆에 있는 밭에서 자란 채소를 멸치 젓국과 고춧가루를 버물렸다. 그때 혼자 올라갔고 누가 죽 썼으니 먹으라고 안내 하는 분도 없어서 그랬던 것 같다. 그 때 그러고 나서는 금식 후는 꼭 죽을 먹어야 하는 까닭을 절감하였다.

 

기도원에 올라가면 먼저 조그만 매점에서 명부에 교회명과 직분명을 기록하였다. 그 때 예배 인도하시는 분이 원장님이신지 누가 계셨는지 모르지만 에배 인도하실 분이 안 계셔서 기도원 예배에 참석 하신 분 중에 직분을 물으셔서 설교를 하신 것이 기억난다. 그래서 그 때 20세 전이었는데 초등 학년 때부터 목회가 소원이어서 설교할 직분이 되는 것이 참 부러웠고 또 소망했다. 그런데 지금 황송 감사하게도 미약하지만 목사가 되게 하셨으니 그때를 상기하면서 주의 종으로서 충성을 새삼 다짐해 본다.

 

1970년도 그 당시만 해도 교계에 기도원이 지금처럼 많이 없었는데 특히 고신 측 기도원이었고 또 한 번 올라가면 경건 된 기도원이 생각이 나서 또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늘 들었었다.

 

그 당시만 해도 고려파의 신앙의 자존심이 막강할 때였다. 기도원에서 기도하러 올라 온 분들을 보고 있거나 또 잠깐 말을 들어보면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 때 형님 정도의 한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고려신학교 학생이라 하였다. 그 때 목사 후보생이라는 것에 참 부러운 마음이 들었었다. 지금 어디서 목회를 잘 하고 계실 줄 믿는다.

 

이년 전인가 무척산 기도원 홈페이지에 들른 것 같고 오늘은 사실 요즘 한얼산 기도원 소식이 어떤가 싶어 인터넷에서 검색하려고 글을 친다고 쳤는데 무척산으로 치는 바람에 무척산 기도원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무척산 기도원의 역사를 읽어 보았다. 그리고 무척산 기도원의 역사를 소개하고 싶어서 이 ‘교계소식’ 게시판에 올린다.

 

무척산 기도원의 역사를 읽으면서 기도원을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고난의 수고가 있었는지 생각할 때에 눈이 자꾸 시큼해져 왔다. 무척산 기도원의 고난사와는 비교도 안 되지만 선교사역에서도 그 맛은 약간 볼 수 있어서 동감이 온다.

 

무척산 기도원의 경건성이 다시 떠올려진다. 지금 마치 기도원에 올라와 있는 것 같이 그 때 추억이 생생하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이다. 얼마 전에 무척산 기도원에 대한 이야기를 누구와 함께 회상하면서 그 때 받은 은혜를 말하였다. 그렇기에 더욱 더 무척산 기도원의 신앙성이 초대(初代)와 같이 잘 보수 계대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원한다.

 

주후 2016년 1월 14일 새벽에

 

선지자문서선교회 김반석 목사

 

다음은 무척산기도원 제 3대 원장 되시는 송은파 원장이 쓴 「무척산기도원의 역사」이다.

 

 

글: 송은파 무척산기도원 3대 원장 (1대 원장 명향식 원장의 딸)

 

"무척산 기도원 교회"가 정식 등기본에 기재된 이름이다. 그냥 기도원이 아니다. 무척산은 쌍,척이 주위에는 없다는 뜻이다. 주위에 750m 되는 산이 없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무척산 기도원은 1940년 한상동 목사님이 4명의 다른 목사님들과 일제에 항거 구국기도를 하신 처소였고 1953년부터 기도원이 정식으로 됐으니 전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기도원일 것이다.

 

산정상에 물이 항상 있는 연못이 있는 곳은 백두산 천지다음이다. 너무나 작은 연못이나 밑에 작은 샘물이 솟고 있어서 물이 마르지 않는다. 한라산 정상에는 가물면 마르기에 한국에서 두 번째이다. 단 물이 없어 뵈는 때는 밑에 동리에 농사용으로 물을 빼는 일이 있을 때 만이다.

 

우리나라에 산꼭대기에는 어딜 가나 절이 있고 그 밑에 교회, 기도원이 있는데 무척산 기도원 교회만 정상에 교회가 있고 그 밑에 절이 있는 유일한 현상이다. 또 전국에서 유일한 것은 차 소리가 안 들리고 새벽에는 각종 새소리만 들리는 곳이다. 이런 험하고 힘든 곳에 기도원이 서게 된 것은 일제말기에 생명의 위험을 받고 계시던 부산 삼일교회 를 시무하시던 한상동 목사님께서 손명복목사님과 다른 옥중 성도된 분들과 이 나라를 위한 구국기도를 하시고 그 후에 투옥 되신 곳이다.

 

1952년 우리 어머님(명향식 초대원장님) 께서 부산 삼일교회 집회 강사로 가셔서 한상동 목사님을 뵙고 너무나 감동되어 즉시 고신 진영으로 오셨다.

 

1953년 겨울 자성대 교회 집회를 하시고 (백령도-울릉도까지 전국에 집회를 안 하신 곳이 없었다) 자성대 교회를 개척하신 조성권 전도사님(현재 미국)과 그 교회 여전도사님 이셨던 표지현전도사님과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화제는 역시 태양신과 싸워 이기신 옥중성도들 그중에 한상동 목사님에 관하여 말할 때 삼일교회 여 집사님이 그 오인의 옥중성도들이 산에 숨어서 나라를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실 때 그분들의 밥을 해드렸고 그곳이 김해군 생림면 생철리 무척산 정상이었다고 말하자 그 귀한 옥중성도들이 눈물로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신 그 장소에 우리도 한번 가서 기도하자고 의견을 모으고 당장 이튿날 그 추운데 트럭을 대절하여(당시에 버스가 없었다) 명향식, 조성권사모님, 표지현, 이정희, 문복순 그외 여러 성도들이 쌀, 소금, 고추가루, 깨소금, 초, 성냥, 담요, 보따리를 각각이고 무척산에 올랐다.

 

올라가니 연못이 당시에는 굉장히 깊었다. 작은 암자가 있었고 지금의 식당자리는 숯 굽는 장소여서 여기 저기 나무가 쓰러져 있고 숯 부스러기로 어지러웠다. 저녁을 지어 밥 위에 소금에 깨, 고추가루 뿌려서 비벼먹는 그 맛은 꿀맛이었다.

 

밤이 되어 예배를 드리는데 울음바다였고 얼마나 은혜가 충만하고 기뻤던지 전부다 일어나 춤추고 산에 흩어져 기도하고 2일후 보따리이고 춤을 추면서 찬송 부르며 내려갔다. 그 후 시간 있을 때 마다 트럭을 타고 가서 큰 은혜를 받았다.

 

이 큰 은혜를 어떻게 우리만 받겠나 그래서 늘 몇 분이 상주하며 아침저녁 예배드리고 밤이면 다 산꼭대기로 가서 기도하였다. 그 예배는 하나님의 은혜로 50여년이 지난 오늘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계속되고 이것이 무척산 기도원 교회의 시작이 되었다.

 

지금의 별관자리에 버려진 암자가 있어서 방바닥에 풀을 베어 깔고 그 위에 담요를 깔고 예배드리고 밥도 먹고 잠도 자고 각종 벌레와 지네도 나오고 한번은 비오는날 예배드리는데 풀에 있던 뱀이 나왔다. 그러나 누구하나 소리도 안 지르고 너무 은혜가 내리니 그냥 밖으로 던져 버렸다.

 

절터였던 이곳과 무당들이 기도하던 폭포위에 마귀가 득실거렸다. 과연 어머님이하 기도의 대장들이 아니었다면 절터에 교회를 세운다는 것이 너무 힘들었겠구나 깨달았다. 그러나 마귀들 때문에 더 기도하고 은혜는 폭포수와 같았다. 모든 마귀는 혼비백산하여 도망가고 소문 듣고 성도들이 모여드니 불교계에 까지 소문이 나서 불교의 암자를 기독교에 내어 줄 수가 없다하여 할머니 한분을 올려보내서 차지하고 있어 기도원 식구는 다 쫓겨나서 지금의 식당자리에 담요 천막을 치고 때로는 비를 맞으며 "은혜의 소낙비 지금 흡족히 내려" 손뼉을 치며 찬송하며 춤추는 모습이 마치 새 술에 취한 사람들 같았다.

 

암자의 할머니는 신도가 한사람도 안 오니 굶고 앉아 있어 기도원에서 모셔다가 끼마다 식사를 대접하니 그것도 안 되겠다고 집을 헐어 가겠다고 한다. 네! 그러세요.

 

남자 한분이 올라와서 지붕의 기와를 몇 장 벗겨 한 짐 지고 못 밑에다 다 버리고 갔다. 그래서 기도원이 다시 암자에 들어가 방도 더 늘리고 부엌, 마루를 만들었다.

 

1954년도에 y집사님이 각 교회로 다니며 헌금을 모아서 성전을 짓다가 너무 힘이 들어 말없이 가버렸다. 그 해 어머님이 원장으로 취임하시어 교회를 20평 돌 벽돌로 지었고 삼일교회 이정희 집사님이 자갈치 건어물, 젖국 장사를 하시어 온갖 반찬을 20여 년 간 대어 주셨다.

 

그런데 성전이 너무 좁아 집회를 할수가 없어 50평으로 증축할 때 이약신목사님의 사위이신 이봉은 장로님이 성전 마루와 천장을 판자로 덮어 주셨다. 이약신목사님의 사모님이 진해고아원 원장님이셨고 이봉은장로님 사모님(이보민교수의 모친)이 많은 도움을 끊임없이 주셨다.

 

8월에는 여름 정기집회를 했다. 66년도 김주오 목사님, 67년도 식대가 30원일때 박윤선 박사님, 식대가 35원할때 서울충현교회 최훈목사님, 72년도 홍반식 박사님, 73년도 이근삼 박사님, 오종덕 목사님, 오병세박사님, 80년에 이보민박사,손봉호박사, 민경배 연대교수, 김진홍 목사, 석원태목사, 82년도 이금도목사, 임종만 목사, 박종수 목사, 조현식목사, 최일영 목사, 박두욱목사, 김성환 목사(서울성도교회) 류태영박사, 모든 집회의 사회는 부산동교회 김정득 목사님이 30년을 했고 음악강사는 문덕준 장로님, 김외작 서울총신대교수 그 외에도 많은 강사목사님들이 계셨다.

 

1956년도(?)에 생철리 동리에 복음을 전해야 겠다고 어머님께서 집회 갔다 오시면서 생철리 회관을 빌려 과자를 사다가 전도를 하셨고 그후에 전도사님들이 개척하셨다. 생철리에서 김대룡, 손현보 그 외에도 여러 목사님이 나왔다.

 

생철리 동네에서 약 1km 산쪽으로 과수원이 있었다. 과일을 좋아하시던 어머님께서 기도원에 오르실 때마다 들려서 과일도 밥도 잡수실 만큼 과수원 주인 내외가 친절이 각별하셨다. 그 아버님이 농사짓는 분이시나 교양이 있어서 대화도 되고 그 어머니도 하도 친절하셔서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이 부산에 어느 중고등학교 재단 이사로 오래 계셨고 진영에서도 어려워 공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야간학교 세우는데 많은 도움을 주셨고 선생님들 여러분을 책임지시는 좋은 일을 하셨던 분이셨다.

 

이집 딸 중에 막내딸이 있었는데 한 번도 보지는 못했으나 소문이 난 아가씨이다. 생철리 동리에서 글씨를 제일 잘 쓰고 철학서적과 수준 높은 책을 많이 보고 말재주도 대단한 딸이었다. 그런데 이 딸이 괴짜다. 키는 작고 얼굴은 여자답게 생겼는데 말소리, 걸음걸이가 꼭 남자 같다. 대화를 할 때 손을 바지주머니에 넣고 남자들같이 계면쩍으면 머리를 긁으며 깡패들의 제스추어 같은 행동을 하였다. 자기 부모에게 명선생이란 분에 대해 하도 많이 들어 보아 한번 만나려 했고 그 아버지가 우리 어머님과 딸을 만나게 하려고 애썼다.

 

아버지가 딸을 권하니 딸이 " 아부지 그 여자가 예수 믿으라 하지예 뻔한것 아입니까? 하니 아버지가 아니다 분명히 예수선생인데 한번도 우리보고 예수 믿으란 말 안 하더라 이상하지? 그 말에 매력을 느껴 만났다. 그런데 처음 만나 대화를 하다가 그만 이 딸이 홀딱 반했다. 이 세상에 저렇게 훌륭한 분이 저 산꼭대기에 계시다니... 그런데 기도원에 한번 오라는 말씀도 없고. 그러니 더 궁금하고 기도원에 가고 싶어서 "저 선생님! 나 기도원에 놀러 쫌 가면 안 될까예. 오! 좋지 왜 안돼 한번 와 봐 좋지.

 

이튿날 당장 남동생이 옷 보따리와 책을 잔뜩 지고 왔다. "저(머리 긁으며) 나 며칠 있어도 될까예" "오 그래" 그럼 한번 있어봐. 방 한 칸 주어서 저녁도 먹고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예배드리러 가자는 말이 없어 "저 선생님 기도원에 오면 예배라 카는것 가 보는 것 아닙니까? 오 그래 그럼 한번 가볼래. 그래서 참석한 예배 첫 시간부터 매료되고 설교에 흠뻑 빠지고 은혜를 받았다.

 

(남자같이 계면쩍으면 머리긁는 그대로 긁으며) 선생님 나 금식좀 할까예? 그래 마음 내키는 대로해. 그래서 20일 금식을 하면서 예수님께 푹 빠지고 어머님에게 홀딱 반한 그 사랑과 충성심이 어머님 돌아 가실 때 까지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이 딸이 바로 필리핀 선교사인 김자선이다. 막내 남동생은 생철리 교회 장로님이 되셨고 큰 언니 빼고는 온 가족이 다 열열한 교인이고 부모님도 예수 믿고 돌아 가셨고 그의 아버지 장례식 때 표지현 원장님과 기도원 식구들이 며칠 가서 자면서 꽃상여 만들고 부산 동교회 김정득목사님이 장례 주례 예배인도 하다가 생철리 주민인 불신 친척들에게 기독교식으로 한다고 맞아 죽을 뻔 했다.

 

1960년에 1대 총무에 신귀영이 되고 1961년 2대 총무에 김종대. 2대 총무 김종대는 진해에서 우리 어머니께 전도 받고 열심히 교회에 봉사 잘하는 미남 청년이었으나 폐가 나빠서 무척산에 와서 은혜 받고 병도 낫고 고신 나와 울산 큰 교회를 개척하신 목사님이시다.

 

대구 서교회 권오정 목사님도 십대에 무척산에 와서 기도하고 산에 나무 하다가 고신을 나와서 목사님이 되셨다. 무척산에 와서 은혜를 받고 목사님이 되신 분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나오셨다.

 

1965년 3대 총무에 최무식집사가 되셨다. 부산의대를 중퇴하고 방황하다가 무척산에 와서 은혜를 받고 고신을 나와 현 대구 칠산동부교회 시무하시는 담임목사님이시다.

 

1968년에 조정우4대 총무가 됐다. 그는 서울 괜찮은 집 장남이고 대장이고 온 가정의 중심이였고 꽤 미남이었다. 그의 어머니가 집사다. 주일학교 다녔다는 이 사람이 목사님이 심방오시면 인상 팍 써서 모두 죄인 같이 예배를 드렸다. 그러던 중 중병이 들었다. 세브란스에서 수술을 받았는데 유명한 전문 의사 7명이 장시간 수술을 했는데 배(또는 창자)에서 고름이 거의 2리터 나왔다. 세브란스 생긴후 이런 환자는 처음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목 아래서 무릎까지 기브스를 하는데 뜨끈뜨끈한 가마솥 같은 위에 눕혀놓고 거즈 한겹 위에 회반죽을 돌려가며 기브스를 한 후 다시 식으면서 끈쩍끈쩍 하고 가렵고 혼자서는 뒤척이지도 못하고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던지...나중에 농담으로 " 간첩에게 고문하지 말고 전신 기브스를 해봐라 다 줄줄이 자백할거다" 이 무서운 고문 도구 속에서 하얗고 깔끔 떨던 사람이...."엄마 빨리 목사님과 명선생님 불러와라 나 예수 믿을께! 교회 꼭 나갈께. 줄 항복했다. 퇴원후 집에 누워서 우리 어머님이 매일 예배드리고 박윤선박사님도 한번씩 오셔서 예배를 드렸다. (당시 박윤선 목사님과 우리 어머님이 노량진 한성교회를 개척 하실때다).

 

조정우 친구들이 문병 왔다가 예배시간이 걸리면 꼼짝없이 같이 예배를 드렸다. 기도 시간에 어느 여집사가 단어마다"아 주여" 하니깐 친구가 정우야 목사 기도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왜 옆에 있는 아줌마가 아-쭈!! 아-쭈!! 왜 그러는데....기브스를 푼 후에 무척산에 요양하러 왔다. 호롱불 밑에서 매일 아침저녁 예배드리며 기브스 못지않은 고난의 기간을 보냈다.

 

한번은 예배시간에 빙 둘러 앉어 예배드리면서 조 총무님 기도인도 하십시요. 평생 처음 기도를 시키니 몇 마디 중얼 거리더니" 할 말은 많사오나 불초소생 이만 줄이겠습니다." 하니 웃음이 정신병자 수준이었던 내가 웃음이 탁 터져 밖으로 뛰쳐나가니 예배 시간이 엉망이었다.

 

후에 송도에 고신대학원에 입학했으나 경상도 사투리 대가이신 박성복 교수님의 강의를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고 중간고사 치겠다는 말조차 못 알아들어 한 학기 후 서울 총신으로 갔다. 현재 강남에서 목회를 잘하는 목사님이시다.

 

1969년 우리 어머님께서 집회 인도하시던 중 오빠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입원했다. 그러나 내일 집회를 마치고 가려고 하니 뇌수술을 했으니 속히 오시라고 연락이 왔다. 그 당시 뇌수술이면 생명이 위독한 것 아닌가 그래서 병원으로 가셨다.

 

벌써 밤이었다. 병원에 도착하여 오토바이 사고로 뇌수술을 받은 환자의 방이 어디요 이름이 송현호요 하니 아주머니 다른 아들이 또 있습니까? 아니요. 내 아들은 외아들 내 독자요 어느 방이요? 왜 안가르쳐 줘요? 이 사람들이 장난치나? 아주머니!! 마음 크게 잡수세요. 내 걱정 말아요 나는 예수믿는 사람이니 자 어서 알려줘요. 서로 고개 짓을 하더니 한 직원이 앞서서 따라오세요. 그러더니 지하실로 간다. 아니 왜? 그런 순간 "시체실"이 나온다. 아 그렇구나 갔구나! 눈앞이 캄캄하여 아무것도 안보이고 휘청하는 순간 하늘문이 열리고 천군천사들의 노래인지 알수없으나 너무나 아름다운 노래가 들리는데 다아는 노래 같더라고. 아 저 좋은 천국에 갔구나. 그 순간 얼마나 기쁜지.

 

기자들이 모여서, 어둑해 오는 시골길을 달리다가 앞에 오는 두 남녀를 발견하고 급정거를 하려다가 바로 앞에 모래 더미가 있어 오토바이가 뺑뺑 돌더니 사람은 아스팔트위에, 오토바이는 논두렁에 떨어져 오토바이 는 상하지 않고 사람은“탁” 하는 머리 깨어지는 소리가 컸다고

 

그러나 증언하는 남자의 말이 이상한 데가 있으니 조사해 보자고 ,혹 뺑소니 차가 있었을 수 있다고, 아니요 내 아들은 저 좋은 천국에 갔고 또 다른 사람 살리려다 사고를 당했다면 얼마나 좋은 일 했으니 됐습니다. 설혹 뺑소니 당했다 해도 이미 죽은 내 아들입니다. 우리 어머니에게는 오빠가 너무나 별나게 낳은 아들이었단다.

 

하얼빈에서 여섯 번이나 유산을 하고 임신했기에 또 위험해서 큰 병원에서 독일인 의사를 만났다. 이 아이를 유산하고 자궁을 튼튼하게 치료하고 다시 애기를 가질래? 아니면 의사의 지시대로 힘들지만 이 아이를 살릴까? 무엇이든 하라는 대로 다 할테니 이 아이만 살려달라고 그러면 매일 한 번씩 병원의 세단차로 조용히 살살 다닐 것, 둘째는 해산할 때까지 꼼짝 말고 누워서 아무 일도 하지 말고 베개도 들지 말고 누워만 있을래? 그래도 순종해서 출산하게 됐는데 본래 머리가 큰 아이가 해산달 까지 누워만 지냈으니 큰 난산이었다.

 

의사가 엄마와 아이나 한사람만 택하시오 아니면 둘다 죽습니다. (1936년 개복수술이 없었던 때다) 아버지가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까? 엄마를 살려야지요, 그래서 애기를 각을 뜰 준비가 완료됐다고 알리는 순간 애기가 나왔다. 그렇게 별나게 태어나서 온 집안, 이웃의 우상 같던 아들이 갔다.

 

한번은 어느 지망에 부흥회 인도하러 갔는데 여집사 한분이 “선생님 왜 하필이면 하나님이 왜 명선생님의 아들을” 그것도 왜 과부의 외아들을 데려갔답니까? 네? 답을 요구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글쎄?... 왜 그리 하셨는지 한번도 그런 생각을 안 해봐서 ... 글쎄요? ... 그때 생각하신 것이 아! 왜인지의 답을 알 때까지는 부흥회를 중단 해야겠구나.

 

집에 오시자마자 보따리를 다 싸지고 가신다. “엄마 왜 그래? 내가 못되게 굴었어? 엄마 속 썩여서 그래?” “아니다 왜 인지 이제는 무척산에 가서 살아야 할 것 같다. ”그리고는 훌쩍 아주 서울을 떠나셨다. (69년) 내게는 큰 아픔, 설움이었다.

 

많은 세월이 흐른 뒤 설교하시면서 왜 하나님이 나의 외아들을 35세에 데려가셨는지 왜 그렇게 하셨는지 답을 찾기 전에는 집회를 할 수가 없어서 답을 찾으러 왔는데 그 왜?의 답은 못 찾았으나이 십년동안을 돌아보니 많은 집도 짓고 길도 만들고 수많은 깡패 술중독자들이 회개하고 낙심한자들이 예수께 돌아와서 믿음생활을 하고 수많은 목사님들이 재충전을 받았고, 수많은 목사님들이 배출되셨다고 간증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천국에 가시기 3일전 “얘! 다윗이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셨다고’ 그런데 나는 손 넓이? 아이고 나는 그 보다 더 짧게 남은 것 같다.” 그리고 그 날부터 굴에 가서 기도 하시고 와서 “얘 누가 들으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밤낮 회개해도 그렇게도 죄가 많더니 이젠 그저 깨끗해진 것 같고 왜인지 회개할게 없는 것 같고 그저 기쁘고 감사만 넘친다. 왜 내가 그러지?”

 

그날 밤에 나보고 "네 방에 가서 자라 나 혼자 자고 싶다" 그러고 배재숙 집사가 들으니 누구와 얘기를 하시더라고, 내가 방에 있는 줄 알았는데 사람하고 말하는 것과 다르더라고 이튿날 그래서 뭐 잘못 들었겠지 하고 말았다.

 

그날이 1979년 3월 23일이다. 아침 일찍 부산 사상교회 박창환 목사님이 오셨다. 어머님이 너무 반가워하시면서 목사님 내가 속이 갑갑하니 예배 좀 인도해 달라고 부탁하신다. 몸살이 났는데 아마 산에서 자서 그런 것 같다고, 그래서 모두 다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주 기도가 끝나고 아멘... 그런데 목사님 한번만 기도 더 해주세요 그래서 다 놀랐다. 평소 무례하지 않으신 예의 바르신 어른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다행이 목사님이 싫다고 안하고 또 기도를 간단하게 하셨다.

 

매점보시던 김혜선 집사님이 이상해서 눈을 뜨고 기도했는데 기도가 다 되어갈 때 어머니가 방에 있는 사람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둘러 보시 더라고, 나도 뭔가 이상해서 아멘 할 때 눈을 뜨고 보니 어머니가 배식이 웃으시는데 입가에 거품이 보글보글 올라와서 엄마! 엄마! 왜 그런가 물어보려고 불렀는데 금방도 말씀하시던 어른이 방금 아멘 할 때 천국으로 가신 것이다.

 

이럴 수가! 목사님도 모두 그렇게 가는 법이 없다. 입신하신 것 같으니 덥게 해드리고 조용히 물러가자고, 그러나 그것이 영원한 마지막이었다.

 

돌아가신 순간 이마의 주름이 쫙- 펴졌는데 3월인데도 나무전지를 한 달이나 하셔서 겨울인데도 이마가 새까맣게 그을렸는데 그 부분이 펴지니 이마가 알록달록 하다.

 

몸살을 계속 하시면서 교회와 숙소를 오는 길에 칠변화 나뭇가지가 죽은 것을 하나하나 다 전지하시느라 이마가 그렇게 그을렸다. 그토록 나무 하나하나를 너무 소중히 다루셨고 무척이나 사랑하셨다. 전지가위도 싸구려라서 얼마나 뻑뻑한지 .... 한번은 “ 얘 이것 좀 배워라 나중에 내가 죽으면 네가 배워서 전지하지” 하시기에 “엄마 제발 끔찍한 말 좀 하지마, 내가 미쳤어? 이 산골 시골에서 나무나 전지하라고?” 그 못된 말은 다 불효로..어머니 돌아가고 3월부터 하루 6시간에서 7시간 전지하여 지난 24년을.....어머님의 말씀이 예언이 되었다.

 

1970년, 서울 영동 교회 김경래 장로님이 경향신문 편집국장으로 계실 때 그렇게 바쁜데 틈 만나면 온 가족이 오시고 손봉호 교수님 가족도 동행하실 때도 종종 있었다. 딸이 다섯, 하나 아들인데 믿음이 없다고 자주 산에 보냈다. 대학생인데 방학하면 거의 산에 와 새벽에 지게지고 산에 가서 나무 한짐 지고 와서 부엌 가마솥에 물한 솥 붓고 연기에 울며 불을 때놓고는 “집사님들 밥해요 물한 솥 데워 놓았어요” 몸무게 약 100kg(?), 현재 미국서 목사 되었다. 늦게 늦동이 동생 낳아서 독자를 면했다.

 

그때의 무척산 길이 지금보다 매우 좁고 험한 오솔길이어서 짐 지고 오기가 힘들었다. 폭포 밑에는 다리가 없어서 장마 지면 올라 올수가 없었다. 그래서 김경래 장로님이 길을 보수, 확장 하고 폭포 밑에 철다리를 했다. 길이 험해서 예상보다 거의 갑절이 들었고 사모님이신 차은희 권사님은 계속 물질의 도움을 주셨다.

 

78년도에 시작된 기도원 철거령으로 작은 기도실, 굴, 남녀 숙소가 많이 자진 철거되고 지금 있는 7동 보존된 것은 전적 김경래 장로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생철리 주민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사생결단한 것 같이 계속 도지사에게 청와대로, 안기부, 보안사로, 감사원으로 탄원서!! 진정서!! 해명서!!를 올렸다.

 

"기도원이 사이비다"

"동리 식수를 오염시킨다."

“병자가 많다. ”

 

78년 12월 2일 고려파 총회장 최만술 목사님이 무척산 기도원 교회는 사이비가 아닌 본교단에 소속된 교회임을 증명 서류를 해서 군수, 도지사, 감사원장에게 보냈다.

 

김장로님 계속해서 대통령 각하 앞으로 철거 보류 탄원서를 내고 또 성도들의 서명 날인을 받고 서명자대표 김경래 탄원인 197의 이름으로 내고 보안사에도 올렸다.

 

한번은 감사원장께 주민들이 올린 탄원서 때문에 서울에 갔더니 김경래 장로님이 마침 지금 서울 프라자 호텔에 감사원장님이 와 계시니 올라가서 직접 만나자고 그러나 말도 할 줄 모르는 내가 어찌. 그래서 제발 장로님 혼자 만나시라고 사정했더니 장로님이 혼자 만나서 잘 해결됐다.

 

1957년 무척산 기도원 이사회가 조직되었다. 고신의 목사님, 장로님, 집사님들로 구성되었다.

 

목사= 이삼열, 이금도, 박창환, 전성도, 박태수, 김종삼, 박유생, 심상동, 조긍천, 최무식,

 

장로 = 김경래, 이봉은, 양상현, 박덕원, 박재덕, 박문진, 신정학, 윤영경, 신기철,

 

기타 = 명향식, 표지현, 이정희, 길봉숙, 문복순, 문복준, 김영옥, 이종봉, 이화영, 천갑조

 

1976년 5대 총무 조원춘, 무척산에서 예수 믿었다. 사모님인 이화자 권사님과 소아마비로 두 다리를 못 쓰는 둘째 아드님과 희생적인 사랑으로 그 아들과 결혼하겠다고 따라온 처녀를 무척에서 결혼식을 했는데 어머님이 주례를 하셨다.

 

조총무는 이승만 대통령당시 1호차를 타고 대통령을 경호하신 분이라서 박정희 대통령 때도 후배들이 청와대서 여럿이 있어 정보가 빨랐다. 이때 기도원 불하를 신청했다. 마침 그때 78년 2, 10 대통령령, 8,852호에 의해 (대통령=박정희, 국무총리=최규하, 국무위원 내무장관= 김치열) 국유지 무단 점유자들에게 불하를 허락했으나 전국 국유지 무단 점유가 너무 많아서 이 대통령령은 7일후 취소되었다. (이 일은 일반 국민들은 거의 모른다). 그래서 불하가 합법적이니 국가가 안 해 줄 수 없어 허락이 됐다. 그러나 등기가 안 된 상태였다.

 

그런 때 이화자 권사님이 밤에 자다가 갑자기 발목에 단이 붙어서(병명모름) 벌겋게 붓고 급속도로 다리로 퍼져서 밤에 업고 부산 복음병원으로 갔다가 둘째 아들이 부산에서 가게를 차리고 있는 집으로 합류하고 무척산에서는 아주 내려가셨다.

 

78년 겨울 정부 시책에 의해 기도원 자진 철거령이 내렸다. 서울에 있는 내게 급히 오라고 전보가 계속 왔다. 전화가 없던 때라 불하 받은 것의 등기 미비 된 서류를 빨리 안하면 불하가 무효 되고 철거되게 되었다고, 그때 식당 공사가 절반쯤 되었다가 중단상태고 철거반이 올라온다는 계고장이 날아오고 또 사람이 오고 난리였다.

 

엄마는 입술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그래서 송은파가 무척산 기도원 교회 전도사로 취임하고 “우리 기도원은 국유지 무단 점유가 아니라는 "서류를 해서 청와대로, 부산 도청, 산림청, 군청, 면사무소, 동네 통장에게로 계속 다녔다.

그런데 생철리서 주민들이 기도원이 불하받는다는 말을 듣고 왜 연고도 없는 서울내기에게 불하해 주느냐 불법이라고 탄원서를 안 보낸 곳이 없다.

 

서울, 부산, 김해가 다 골치를 앓게 된 것이 법적으로는 흠이 없으나 주민들이 워낙 거세게 나오니 도청, 군청, 면, 무척산 서류가 캐비넷에 꽉 찰 정도였다. 기도원을 보아주면 공무원 목을 따겠다고 공갈치지.... 돈도 없고 차도없이 이 싸움을 하기엔 너무나 역부족이다. 그런 중 어머님이 소천 하셨다. 모두 철거 때문에 심장마비를 일으켰다고 어머님이 직접 사인이 심장마비로 의학박사 이봉은 장로님이 진단하셨다.

 

어머님 장례 치르고 앉아서 시간이 없다. 결국 큰 건물 7동만 불하하기로 하고 남은 곡간, 굴, 숙소 7동은 자진 철거했다.

 

이런 숨 막히는 상황에서 무척산 기도원을 제일 아끼시는 목사님들이 모여서 돌아가며 기도원 원장을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고 나는 절대로 안 된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서 표지현 전도사님께 원장직을 위임하셨으니 그분이 원장이 되는 것이 어머님의 유언인 동시에 하나님의 뜻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하셨으니 우리는 순종해야 된다고. 그러나 목사님들 강력해서 포기를 안 하신다.

 

또 오라고 부른다. 다들 생각들이 강하시니 아무리 하나님의 뜻이라 해도 막무가내다. 후에 알고 보니 전에 총무 하던 목사님이 전혀 내 말은 무시하고 목사님들과 하나가 되어 송은파는 나이는 40이나 너무 애기 같고 철도 없고 하니 애들 공부 시켜 준다고 달래라고...나하고 친한데도 돌아서서는 이렇게 다르다.

 

이번에는 목사님들 더 많이 모였다. ”얘들 등록금은 어떻게 하겠느냐? 표선생은 안줄 것이라고“ 애기 다루듯 한다.

 

네, 내 애들 등록금 때문에 하나님의 뜻인 표선생을 버리고 목사님 말을 들을까요? 나는 애들 공부 못시켜도 그렇게는 못합니다. 저는 하나님의 뜻과 어머님의 유언을 따라야겠습니다.

 

어느 연로한 목사님이 정색을 하고 일어서서, 하나님의 뜻이라고 명선생님이 말씀하셨다는데 더 이상 왈가왈부해서는 안 되지요, 더는 이 말은 없었던 것으로 합시다. 그래서 일단락 지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무척산에서 아이들 등록금을 얻어 쓰지 않게 하셨다.

 

1979년 5월 서울에 계신 표전도사님께 가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다 말씀드리니, 당장 보따리 싸가지고 오셔서 제2대 원장으로 취임하셨다.

 

하나님은 주의 일을 자원하는 사람만 쓰시지 않고 강제로 억지로도 하게 하신다. 표지현 원장님은 그리도 싫다고 하셨으나 결국은 무척산 원장이 되셨다. 오신 때로부터 전기가 없어 밤마다 발전기 붕붕 돌리면 전기가 오기도 하고 오기도 하고 전기가 와도 밤 10시면 호롱불 아래서 지내셨다.

가난과 불하 문제, 동리 사람들의 지칠줄 모르는 탄원서, 철거령, 깡패출신 청년들, 술 끊으려고 왔다가 못 참고 생철리 동네 가서 외상술 먹고 난동부리고.... 너무 힘들어서 그만 울어 버리셨다.

 

새원장님이 오셨으니 나는 좋다고 서울로 가버렸고 군청, 파출소, 면사무소에 내가 다니던 데를 표원장님 가시니 무얼 알아야지 “아니 당신이 원장이요 그런데 왜 그리 몰라요? 송은파는 왜 안보여요? 송은파 보내고 다시는 당신은 오지 말라”고 혼이 나서 차원찬 집사님을 군수에게 보냈다가 얼마나 혼이 나고 오셨는지 두 다리가 딱딱 마주칠 정도로 떨고 산에 와서 저녁밥을 입에 넣고도 씹지도 못하고 "송선생 정말 그동안 수고 많이 했습니다" 그 말만 반복해서... 정신 이상이 되는 줄 알고 다 놀랐다고 한다.

 

전보가 서울로 빗발치듯하고 공갈 편지와 사람을 보내고 하여 다시 산으로 왔다. 전에 어머님이 말씀하시기를 “네가 주의 일 하면 주님이 네 일을 해주실텐데..”그 말이 겁이 나서도 안 올 수가 없었다.

 

보안사, 안기부, 감사원에서 조사가 군청, 면사무소에 내려와 경상도 일대가 다 떨었다. 어떤 군은 쑥대밭이 됐고 그러나 우리 기도원은 아무리 들추어도 불법이 하나도 없고 전부 합법적인 절차니 어쩔 수가 없이 승인이 났다. 그러나 대통령보다 더 무서운 사람이 동리 통장이다.

 

아무리 설명해도 사생결단으로 도장을 안 찍어 준다. 부산 삼일교회 양상현 장로님과 법원에 다니시는 박장로님이 케잌을 사고 자기들 돈으로 내복까지 사들고 가서 “통장님 합법 절차를 이장님이 안 찍어 주시면 이것은 불법입니다.” 통장이 무식이 담대다 야!- 욕을 퍼부으며 케잌을 마당에 때기장을 친다. 높은 두 장로님 쓴 웃음으로 가셨다.

 

한번은 지서 주임이 날보고 “야- 송은파 니 디게 똑똑하다고 모두 머리를 흔든데이, 니만 보면 큰소리치시던 군수님도 말 못한다지? 그리고 생철리 동네서 너거 못살게 굴던 사람은 다 죽었다지?”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금시초문인데 ....”알고보니 가장 못살게 굴던 세 사람이 벌써 죽고 제일 키 크고 (180cm넘는) 건강하고 똑똑하고 목소리 큰 남자가 무슨 암이 걸려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처지가 되었다고 소문이 다 퍼졌다고 한다. 그것으로 동네의 무서운 핍박은 끝났다.

 

김자선 선교사의 남동생 김송하 장로님이 동네 유지고, 동네사람 거의가 다 친척이다. 그래서 김장로님이 도장 책임지시오 나는 정말 안되겠소... 마침 이장님이 외출이라 부인에게 아지매요 내 데기 급한데 퍼뜩 도장 갖고 와서 이 서류에 도장 좀 찍어 주이소 내가 무식해서 뭐 아나 우야꼬 아이고 마 내가 찍으라 하는데 불끈 누질르소마. 그래서 모든 서류가 끝이 났다.

 

78년 11월30일 철거 계고장이 날아온 날 너무 급히 택시서 내리다가 문에 새끼손가락이 치어 손톱이 빠져 피가 흐르는데 그냥 산에 올라가 엄마한테 응석부렸으나 나를 이 세상에서 아들보다 더 사랑하신다던 어머니가 얼마나 놀라고 가슴 아프셨을까? 이제는 응석부려도 사랑해줄 어머니도 안계시고 손에서는 피가 흐르고 눈에서는 눈물이 그냥 쏟아졌다.

 

청년들이 마중 나와서 겨울밤에 산에 올라왔다. 그날 밤 꿈을 꾸었다. “어머니 나타나셔서 너 빨리 김경래 장로님을 만나라 ... 엄마 이제 다 끝나게 됐고 등기소에만 가면 되는데 왜 김장로님을 만나? 두 번째 "너 빨리 김경래 장로님을 만나라 ... ” 세 번째 동일한 말씀 하시면서 길게 여운을 남기면서 연기 같이 사라지신다.

 

이튿날 새벽에 꿈 얘기 했더니 모든 식구와 기도하러 오신 성도들이 다 이 꿈은 보통 꿈이 아니니 속히 내려가서 일단 김경래 장로님을 만나라고, 그저 막연히 내려가서 어디 갈 데도 없어서 면사무소 면장실에 들어갔다. 아이고 왠일이십니까? 하고 반겨준다. 할 말이 없어서 그냥 놀러왔어요 라고 대답하였다. 커피마시면서 하하하..까르르.. 내 웃음소리가 요란해서 늘 어머니께 꾸중 들어도 못 고쳤다. 왜 그리도 잘 웃던지 그런데 마침 그때 오대 총무였던 분의 사모님인 이화자 권사님이 내 부탁으로 민원실에서 등기 서류에 도장을 찍으러 왔는데 송은파 본인이 아니면 절대 안 된다고 해서 산에는 전화도 없지, 토요일이니 오전에 끝내야지, 기가차서 앉았는데 그 독특한 소프라노의 웃음소리가 민원실에 까지 까르르...아, 저기 송은파 소리네요,

 

주여 감사합니다.

 

면장실에 와 날 데리고 실무자한테 왔다. 자 본인이 왔으니 빨리 해달라고 하니 굉장히 난처한 얼굴로 군청에 전화를 하면서 전화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이권사님이 워낙 경험도 많은 분이라 앞에 있던 모든 우리 서류를 훔쳐 갖고 내 손을 끌고 나왔다.

 

큰일 났다, 군청에서 못해주게 하는 것 같다. 그나저나 어떻게 여기 나타났어? 송은파 귀신인가? 천사인가 했어? 그래서 꿈 얘기 했더니 당장 서울로 가자.. 부산역에서 권사님이 우리 돈도 없는데 전화부터 해보자 하시는데 내가 아니요 그분과 통화하려면 하늘의 별따기예요 라고 답하니 아 그래도 혹시 알아? 전화했더니 장로님이 딱 받으신다. 그래서 다짜고짜로 꿈 얘기, 오늘 상황을 다 얘기 했더니 그것은 꿈이 아니고 분명 하나님의 계시 같으니 그 서류 잘 훔쳤으니 즉시 부산 도청으로 가서 모 기자를 만나라 내가 전화해 놓겠다고 하셨다.

 

급히 가니 벌써 기자가 기다리고 있다가 어서 서류 보자고..서류를 확인 하더니 서류상 아무 하자가 없는데? 하시면서 잠시 다방에 가서 기다리라고 해놓고 도청에 들어 가셨다. 조금 후에 도청에도 아무 하자가 없으니 군청으로 가자고 해서 군청에 갔다. 군청에서 서류를 보니 3일내에 무척산 기도원을 다 철거하게 되어 있었다. 아니 도청산하에 있는 군청이 어떻게 독단으로 이런 일을 한다는 것이냐 불법인줄 모르는 것이요 하고 이야기 하며 지금 도청 서류를 다 검토하고 왔는데 도청에는 전혀 그런 조치가 없었다고 말하니 군청이 발칵 뒤집혔다.

 

사태는 급속도로 역전이 되어 면사무소, 등기부, 다 퇴근을 못하고 우리를 기다렸다. 어둑해진 토요일 오후 면사무소 가니 아침에 그리도 못되게 굴던 실무자가 깍듯이 고개 숙여 맞이하고 즉시 등기소에 우리를 데리고 가서 도장 탁탁 쳐서 서류를 떼서 보여주는데 그 먼 여로가 끝이 났던 것이다. 7동 보존 건물 대지가 불하 등기가 다 된 것이다.

 

696평이 무척산 기도원 교회 종교부지가 됐다. 거의 모든 국유지는 사유지 옆에 조금 붙은 국유지를 개인에게 불하해주는데 무척산기도원만은 전체 국유지에 작은 한 점이 개인에게 불하된 것이다. 이것이 지번 211-1번 2번 3번이 되었다,

 

<211-1,2,3,7동건물은 - 부동산 등기법 제 131조 제1행에 의해 서울특별시 중구 양동 188번지 송은파 명의로 된 것을 79년 10월 14일 증여인(송은파)의소유를 대한 예수교 장로회 무척산 기도원 교회에게 증여함. 소유권 이전 등기 10월 26일, 1543m

<1982년 12월... 군청직원 최선생이 너무나 법을 잘 알고 전적 기도원 편에 서서 너무 충성되게 일을 봐주었다. 제 2차 불하를 또 신청하여서 매점에서부터 샘 옆에 곡간까지 했다. 그러다가 군청에서 최선생에게 날 벼락이 내렸다. 최선생인 워낙 다급하니까 예수도 믿는데 아이고 무척산 식구들 나 모가지 달아나게 됐으니 기도해 달라고 불신자도 기도의 효과는 믿고 있었다.

 

세 번째는 임야를 밭으로 명의 변경하는데도 무척산 같이 일하기 힘든 곳은 전국에서 유일한 것 같다. 공무원을 만때마다 민망하도록 내가 말을 못 알아들어서 언제나 군청, 면사무소, 양산 영림소 등 분명 합법 절차도 무척산만은 인정을 안 해주고 괴롭혀서 부산동교회 김정득목사님과 부산 망미제일교회 박광익목사님께서 아무리 바빠도 한 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늘 자기 일같이 봐주었다.

 

한번은 김해 군청에 일보고 늦게 시장에 가서 찬거리랑 7보따리를 들고 택시를 타고 삼거리에서 내렸다. 빚이 있는 기도원에서 택시를 대절 할 수는 없어 기본요금 되는데서 내려서 버스를 기다렸다. 1시간 후에 퇴근시간이라 만원버스를 보따리 일곱을 들고 탈 수 없어 포기하고 다음 버스를 한시간 반 기다렸다.

 

시골 버스는 정류장이 없어 기사 맘 내키는데 선다. 저 밑에 섰기에 보따리 6개 나르고 마지막 보따리 들고 오니까 버스가 홱 떠나 버린다. 누구를 탓하겠나 하늘을 쳐다보니 별이 초롱초롱 맑기도 하다. 내 나이 41세 초겨울에 하이힐 신고 바바리코트를 입고 이 무슨 꼴인가 생각하니 속상하고 약이 바짝 올라 미치겠다.

 

사람이 아무도 없다. 하나님! 엄마! 나 좀봐 이게 뭐야 안 탈거야 앙앙 엉엉 인기척이 나면 조용, 사람이 사라지면 앙앙,안타 안 해 내가 미쳤어? 나 좀 봐요 이 냄새 나고 덜렁거리고 씻지도 않고 몸 냄새에 술 막걸리에다 싸구려 담배 피워대는 이 버스 내가 다시 타나 봐라 ... 한 시간쯤 울었을까 달이 중천에 떴고 처음 지나간 버스가 다시 오다 보고 기사가 뛰어 내려와서 "아이고 아가씨 아직도 못 갔능교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며 다시 태워주었다.

 

그 후 4년 또는 5년 후에 생각해보니 그 악을 쓴 것도 기도였을까 지나가는 트럭 자가용 누가 태워줘도 단 한 번도 그 시골 버스 안탔다. 깜짝 놀랐다.

 

그 후 1982년도에 표지현 원장님이 무척산에서 8월 집회 인도를 하셨는데 전기가 없어 자가 발전해서 예배 시간에만 전기 켰다가 10시엔 껐으나 펑펑펑 산이 떠나갈 듯 이상한 소리가 나다가 예배 도중에 피-익 하면서 전기가 꺼져서 집회에 광고를 했다. 팔백만원 있으면 전기를 놓을수 있다고.....그 집회에서 헌금이 딱 팔백만원 나와서 그해 10월 전기공사를 완공했다.

 

변압기를 기도원에 세우도록 계약했는데 업자가 힘들다는 이유로 그 당시 모은암 밑에다 설치해서...지금 2005년에도 기도원은 전력이 모자라서 큰 고통을 겪고 있다.

 

차원찬 집사님이 절대 변압기를 기도원에 올려야 된다고...계약대로 해야 된다고.... 소리지르고 난리인데 표원장님과 내가 너무 무식해서 업자편이 되서 변압기를 못 올렸는데 그것이 엄청난 손해인 것을 30년 지난 요즘에 후회를 한다.

 

우리가 팔백만원에 전기를 놓을 때 모은암에도 전기를 쓰게 허락했다 그래서 돈을 좀 내라고 하니까 70만원만 준다. 그리고 전기를 지금까지 같이 사용하고 있다. 해가 바뀌고 모은암에 젊은 주지가 왔다. 기도원 길이 절 밑으로 돼있었으나 절에서 길 건너에 암자를 지으니 기도원이 마치 절 마당으로 통과하는 격이 되었다.

 

그런데 기도원에 올라오는 성도들 중 할머니들이 절 가운데로 올라오니 무시무시하고 뭔가 느낌이 이상하니까 절에서 물까지 얻어먹고 나와서 조금 올라가서 절을 향해 우리 원수 마귀 쫒겨가 기는 찬송을 부르고 "주여! 주여! 사탄아 물러가라"고 소리 지르니 젋은 주지가 얼마나 화가 나겠나, 그래서 겨울에 절 옆 언덕에 사다리 놓은 것을 다 부셔버리고 찬송 부르는 여집사 뺨을 때리고 급기야는 아무리 사과해도 올라 다니는 길을 막아 버렸다.

 

우리는 속수무책 울고만 있었다. 주지에게 싸우려 갈려고 준비하며 기도하는데 누가 옆에서 말해 주 것같이 온유해라,온유로 대하라는 음성이 들린 것 같았다.

이상하다. 그래서 싸우지 않고 겸손하고 온유하게 스님, 개도 나갈 구멍을 열어 주면서 때린다는데 무식한 몇몇 할머니 때문에 마음 상하신 것 사과합니다하고 정중하게 사과를 하였다.그러고 새로운 길을 만들 때 까지는 기도원 길을 열어 달라고 스님에게 부탁을 하였다. 그러나 길을 낼 곳이 없다.

 

부산 동교회 목사님, 송종복, 배상연 장로님 여러 성도들이 울지 말라고 위로하고 기도원 동서남북을 다 돌아 다녀 보아도 그 중 제일 가까운 곳은 역시 구길 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랬더니 그 주지께서 절 외 직원들과 지금의 우리 길을 나무를 베고 풀을 깎으며 만들어 보더니 새 길을 이렇게 내면 훨씬 구길보다 높은 바위들이 있어 절경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또 동교회 목사님, 장로님들이 와서 보시더니 "너무 좋다. 이길 닦자"고 말하였다. 그런데 차원찬 집사님과 김현수 집사의 반대가 얼마나 심한지.....

한편에서는 길을 닦자, 또 한편에서는 안 된다 하니 결국 싸움이었다. 이 두 집사님은 모든 일에 사사건건 반대 안하는 법이 없다. "그래서 안 되면 어떡하느냐 계속 교인들 맞으며 다녀야 되겠냐" 하면서 악을 쓰고 울었다.

동교회 목사님, 장로님이 남이지만 저렇게 땀 흘리며 바쁜 시간을 내서 된다고 하는데 어떻게 무척산 기도원 식구들이 이럴수 있나......

 

그러다 서울 영동교회 장로님이시고 서울대 교수이신 손봉호박사가 강사로 8월 집회를 하였다.

 

여름에 겨울 양복을 입으신 것이 너무 마음 아파서 사례금을 드렸더니 모든 사정을 다 보신 교수님이 그대로 사례금을 돌려보내고 손교수님의 돈 100만원을 더 보태서 길을 하라고 용기를 주셨다. 그 돈으로 부산동교회 배상옥 장로님과 다른 장로님들이 엄청난 경사진 곳에 돌을 쌓아서 지금의 길을 완공하게 된 것이다.

군청에서 소방도로를 내는데 무척산 정상까지 할 계획이었으나 땅주인이 조상묘가 있는 곳에 포크레인은 절대 안 된다고 반대를 심하게 하여서 그 계획을 돌려 모은암까지 차로를 낸 것이다.

그 때 스님이 저 밑 큰 길에서 모은암까지 새로 나는 길을 포장하는데 포장비용을 기도원에서 1500만원을 부담하라고 일방적으로 통고해 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돈을 1500만원 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것도 내 자존심의 교만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도 주님 위해 남에게 구걸하고 하기 싫은 소리도 해서 주님의 교회에 유익이 된다면 한번 해보자 하고 서울에 사는 친구한테 갔다. 대강 얘기했더니 대뜸 되는대로 해주겠단다. 이 너무 쉽기에 안 믿고 그냥 산에 왔다. 얼마 후에 10만원이 왔다. 절에서는 재촉이 빗발친다.

 

하나님께서 송은파의 자존심을 박살낼 계획이 있으신 것 같았다. 좋다. 거지같은 자존심 박살내자. 기도하고 또 다른 곳으로 돈 얻으러 갔다. 기도원에 너무 친하고 너무 겸손하고 털털하고 아주 좋은 집사님이다. 1년 전부터 자기 땅이 재판에 걸렸는데 이기도록 기도해 달라고... 이기면 십일조를 기도원에 하겠다고 하셨던 분이시다.

그런 얘기가 오갔었고 기도원 온 식구가 집사님 기도제목을 가지고 아주 간절하게 기도를 하였다. 그리고 그는 재판에서 승리했다. 그래서 그 돈이 20년 전 20억? 잘 모르지만 하여간 남들이 그 비슷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십일조도 아닌 1500만원만 도와 달라고 하자고 생각하며 그 집사님을 찾아갔다. 그 집에 가서 그날 밤에 잠도 못자고 열심히 기도 했다. 아침 일찍 나를 부르더니 구두가 가득한 박스와 백이 가득한 박스 약 15~20개를 다 내려놓고 구경시켜 준다. 나는 구두나 가방은 필요없고 오직 1500만원 있으면 되는데 ...

그러나 낑낑대고 다 자랑하더니 도로 올려놓는다. 도대체 왜 낑낑대며 보여주고 다시 올려놓는 건 왜일까? 가난하다가 갑자기 돈이 생기니 자랑도 하고도 싶겠지.... 다시 방에 들어가 기도했다. 내가 돈 달라는 말을 꼭 해야 되겠습니까? 내 평생 이런 힘든 일은 처음이나 나를 위해서가 아닌 하나님의 교회 위해서 하는 것이니 나는 거지되면 어떻고 자존심 망가지면 어떻냐 내가 너무 교만해서 하나님이 나를 땅바닥에 때기장 치시는 것이라면 당하리라고 생각을 했었다.

용기를 다하여 기도하며 말을 끄집어냈다. 순간 그리도 겸손하던 그 사람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입가에 비웃음을 띄고 일언지하 거절한다. 후에 그 교회 목사님께 들으니 나와 같은 일을 당했다고 말하신다.

기도해서 재판이기면 십일조와 거금의 헌금을 약속했으나 아무것도 안주고 100만원 헌금만 했다고 한다. 집사님이 내게도 100만원 주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12시에 목걸이와 반지를 살 테니 내가 잘 아는 유명한 집을 가르쳐 달라고 그래서 그곳에서 12시에 만나기로 하고 그 집을 나섰다.

 

아직 시간이 10분쯤 남았기에 냉면을 먹고 만나려고 냉면집에 들어갔다가 그 집사님 내외가 냉면 먹고 나오다가 마주쳤다. 나는 반가워서 나 빨리 먹고 나갈 테니 기다리라고 말하는데 두 사람 다 너무 당황하고 나한테 미안해서 어쩔 줄을 모른다.

 

그때야 생각하니 냉면을 자기들끼리 먹고 나 안사주려다 들켜서 저리도 당황하는구나...

 

"주님 송은파 밟으실 때 매매 밟으시옵소서" 하고 냉면 먹고 금방에 갔다.

 

주인이 몇 천만원 짜리라고 다른 것 보여줄려고 하니 아니 ! 돈은 생각하지 말고 물건만 좋은 것 보여 달라는 말을 세 번이나 한다.

 

나는 기도원 올라간다고 인사하고 나와서 기차 타고 산에 오르는데 비가 주룩 주룩 내린다.

 

하나님! 엄마! 보았지요 이만하면 내 할 일은 다 했지요. 내 자존심 때기장 쳤죠? 됐어요?

 

엄마 당신의 딸이 오늘 1500원짜리 냉면 안사주려고 숨어서 먹는 그들에게 이 수모 당하는 것 어찌 생각 합니까?

 

엉엉 ... 눈물이 비에 섞여 닦을 수도 없이 줄줄 내리는데 산에서 부산 대청교회 장로님들이 내려온다. 그러나 비가 내리니까 내 눈물은 못 보겠지 하고 그냥 빗물 눈물범벅하고 올라가는데 장로님들이 눈물을 보았던 것 같다.

 

아가씨! 산이 그리 높지 않아요 조금씩 올라가면 기도원 가까우니 힘내요. 괜찮아요 용기를 내요 하면서 위로를 한다. 눈물은 더 쏟아져 하나님! 엉엉 엄마! 앙앙...계속 울었다.

그래도 그 집사는 그 가난하다가 모처럼 갑부가 됐는데 하나님께 그 말할 수는 없어서 집사님 이름은 안 밝히고 그저 내 이름만 고했다.

 

 

1983년, 처음으로 전화가 개통되었다. '32-9355'번 전화의 전화선과 전주를 450만원 들여서 개설했다. 이제는 무척산 두메산골에 전기와 들어와서 냉장고를 사용할 수 있고, 전화가 들어오니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다. 이 두 가지 큰 공사와 기도원에 이자 나가던 부채를 표원장님께서 다 정리 하셨다.

 

6월 27일, 이규호 도지사께서 무척산 기도원에 헬기를 타고 오셨다. 생철리 마을이 생긴 이래에 도지사의 방문은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이들은 생철리 주민들이 각 기관마다 진정서와 호소문을 계속 보내서 견딜 수 없어 시찰을 오셨다고 했다.

 

진정서 내용은 기도원이 사이비종파이고, 방마다 폐병환자, 정신이상자가 살면서 못물까지 오염시키니 기도원을 빨리 철거하라는 것이었다.

 

공무원들이 새벽 5시도 안 돼 무척산을 급습하여 방마다 뒤져 보았으나 환자는 한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이 보도는 이미 도청에 전달된 후였다. 군수, 면장, 지서주임, 김해경찰까지 굉장히 많은 인원이 무척산을 방문하였다.

 

때마침 무척산에는 부산 영도4교회를 시무하시는 조긍천 목사님과 부산동교회 김정득 목사님외에 다른 목사님들이 못 위에서 산책을 하고 있었다. 도지사님과 목사님들은 서로 악수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도지사님에게 고신교회 목사님들의 명함을 주면서 무척산 기도원 원장님도 고신대학원 동기동창이라고 소개하였다. 도지사님은 깜짝 놀라셨다.

 

"아니, 이 기도원이 사이비 종파라더니 원장님이 고신대 출신이고, 장로교 고신 목사님들께서 기도하러 오셨다면, 극히 건전한 기도원이 틀림없군요. 저희 집사람도 장로교회 집사니 같이 기도하러 와야겠네요." 그렇게 모두 크게 웃었다.

"네, 꼭 기도하러 오세요." 라고 말했더니 도지사님은 나를 보고 너무 불쌍해 보였던지 힘내라고 격려를 해주며 악수를 청했다. 그리고 다시 크게 "힘내세요."하고 헬기에 오르다가 내려왔다. "원장님, 악수 한번 더 합시다."

 

모두 박수치는 가운데 한 번 더 악수를 하였다. 도지사님은 그렇게 무척산 기도원의 위신을 세워주고 떠나셨다. 그들을 배웅하고 나서, 목사님들은 나보고 손 씻지 말라고 하였다.

 

도지사님께서 일행들이 짊어지고 온 과일, 음식은 손도 안대시고, 내가 드린 머루 포도주가 맛있다고 한 번 더 달라고 해서 더 드셨는데, 모두들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기도 했었다. 그렇게 무척산 기도원은 또 한고비를 넘겼다.

 

1984년 5월 21일, 표지현원장님은 무척산 원장직을 그만두시고 부산 영도 청학 수양관 관장으로 부임하셨다.

 

무척산은 먹고산다는 것이 무척이나 힘든 곳이다. 표원장님께서 갑자기 떠나게 되시니 무척산 식구들은 부모 잃은 고아가 된 것 같았으며, 앞으로 먹고 살 길도 막막하여 다들 넋이 나갔었다.

 

그동안 무척산은 표원장님께서 받으셨던 은사(말씀만 하시면 누구든지 돈, 쌀을 준다)로 먹고살았다. 하지만 이제 고아 같은 우리에게 누가 쌀 한톨을 주겠는가?

 

청학 수양관 총무님은 표선생님의 지인들에게 엽서와 전화로 '표원장님은 무척산 기도원을 떠나셨으며, 청학동 원장님으로 오셨으니 앞으로 청학동으로 오세요' 라고 연락하였다.

 

마치 압살롬에게 쫓겨 울며 맨발로 기드온을 건너는 다윗에게 "혹이 말하기를 압살놈과 모반한 자들 중에 아히도벨이 있더이다."라고 전하는 상황과 같은 아픔을 겪는 듯했다. 그러나 오늘까지 한 번도 다른 사람에게 쌀을 사달라고 해본 적 없이 우리는 기적같이 굶지 않고 살았다.

 

1985년 7월 22일, 부산 자성대교회 다니던 정민이 부모님은 부엌에서 쓰는 식판(츄라이 620,000원)을 사주셨다.

 

1985년 7월 23일, 최실부 집사님께 증기밥솥을 사달라고 평생 처음 떼를 쓰며 돈을 달라고 말해보았다.

 

1985년 8월, 부엌 가마솥에 불을 때서 밥을 할 때였다. 한번 밥을 하면 온 부엌이 더워서 반찬도 못 할 정도였다. 또한 밥을 많이 하면 솥 밑은 타고 위에는 밥이 설었다. 그래서 구덩이에 있는 불덩이를 삽으로 퍼서 솥뚜껑 위에 얹어서 뜸을 드려야만 했다.

 

손복남 집사님이(김현수모친) 불을맡아 땐다. 어느 날 그 곰 같은 집사님의 얼굴을 보니 눈이 벌겋게 헐어있었다. 왜 그런지 이유를 물었더니 땀띠가 자꾸 겹쳐서 그렇다했다. 덥다는 불평도 없이 웃으셨다. 나는 방에 들어와서 울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괜히 죄 없는 최집사 내외에게 "야! 니네들 여름에 불 때서 밥 좀 해봐. 엉엉엉!!" 말하며 막 울었다. 최집사는 즉시 1,000,000원을 냈고, 그 때부터 풀무불 같던 더운 고생도 끝이 났다.

 

1986년, 기적적으로 임야 3000평을 밭으로 지목 변경을 했다. 변상금 244,000원을 지불하고 나서 무척산 식구들과 목사님들이 울면서 기뻐했다. 하지만 우리를 도와주었던 군청직원들은 동리 주민들에게 협박까지 받았다고 한다. 주민들은 그들에게 "너 목이 몇 개냐? 어디 얼마나 붙어있나 보자." 라고 협박했다.

 

불신자였던 군청직원은 우리에게 수고비 한번 받은 적도 없었으나, 주민들에게 얼마나 당했으면 자신들을 위해 기도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무척산 식구들이 얼마나 울며 기도를 했던지 하나님께서 과부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그래서 무척산은 이번에도 고비를 넘겼다.

 

1987년, 땅 위에 있는 성도를 향한 심한 핍박은 자지도 않고, 휴식도 없었다. 여전히 생철리 주민들은 쉬지도 않고 탄원서를 계속 보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주민들이 서울에 높은 곳에 탄원서를 계속 보냈다.

 

그 높고 먼 곳에서 직원 두 사람이 기도원에 왔다. 그들은 밭에서 일하고 있는 차원찬 집사님을 만나서 윽박지르고, 구속하겠다는 공갈을 쳤다. 너무 놀라 얼이 빠진 차집사님은 덜덜 떨며 밥도 먹지 못하고 앓아누웠다.

 

그리고 얼마 후 생철리 주민들의 탄원서 내용대로 기도원은 환자수용으로 식수를 오염시키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기도원 건물을 철거하겠다는 통보가 왔다.

 

너무나 화가나 목사님들과 항의서를 작성했으나, 그 내용이 너무 점잖았다. 그래서 이번에는 내가 직접 썼다.

 

첫째, 식수 오염에 관해 - 고신대 보건 환경부에 수질 검사를 의뢰했더니 일등급으로 나왔고, 알칼리 성분이 전국 어느 지하수보다 월등 하는 것,

 

둘째, 생철리 동리에 어느 한 가정도 무척산 연못의 물을 식수로 사용하지 않으며 가물 때나 농수로 잠깐 사용한다는 것.

 

셋째, 연못에서 흐르는 물은 돌과 자갈에 걸려져 10미터를 지나면 폐수가 아닌 물은 오염될 수 없으며, 무척산 못과 동리와의 거리는 수백미터가 넘는다는 것.

 

넷째, 이런 허위신고에 세밀히 검사도 하지 않았으며, 그 높은 데서 조사를 나왔으면, 조사원은 당연히 실무자를 만나서 말을 들어보는 것이 절차인 것으로 아는데, 그 날 기도원 원장인 내가 있었는데도 밭에서 일하고 있는 할아버지를 만나서 호통과 윽박과 구속하겠다는 공갈을 치고 돌아가는 바람에 아무것도 모르는 할아버지는 병까지 들었다는 것.

 

기도원을 철거해야 겠다고요? 네!! 하십시오. 이런 부당하고 무지하고 무례한 공무원들에게 나는 전국에 계신 목사님들과 대대적으로 데모를 할 것입니다. 라는 항의서를 보냈다.

 

놀랍게도 즉시 귀 기도원에서 보내신 내용이 다 맞으며 크게 사과한다는 내용과 함께 모두 없었던 일로 하겠다고 회신이 왔다. 이렇게 무척산의 태풍은 또 지나갔다.

 

1999년 5월 12일, 남부지방 산림 관리청인 양산국 유림 관리소에서 211-5번지, 넓이 6,174㎡ 밭을 4.630.500원에 매입했다. 이 일로 김해, 생림이 놀라고 떠들썩했다고 한다.

양산 소장, 과장은 우리를 가장 얕보고, 귀찮아해서 합법적인 것도 일체 거절하였다. 이처럼 우리를 너무 힘들게 했던 곳에서 너무 싼 값에 매입했기 때문이다.

 

서울 이스라엘 문화원 김희우 원장님과 그의 부군 배정화는 그 때 불신자였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밑에 있는 이사를 통해서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기적을 이루셨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무능하고 말도 알아듣지 못하는 소심하고 나약한 인생들에게 그때그때 꼭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게 하셔서 홍해 같은 시험과 요단강 같은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러나 홍해 아래의 길이 생기고 요단강의 물이 갈라져서 길이 생기기까지의 그 많은 아픔, 역경을 이제는 사절하고 싶다. 정말 험하고 높은 무척산이다.)

 

이스라엘 문화원 원장 김집사는 무척산 기도원에 대해서 모르는 상태였다. 어느 날 김집사님의 꿈에 어떤 험한 산의 바위굴이 나왔다.

 

김집사님은 '아, 저런 굴에 가서 기도 좀 했으면' 하는 마음으로 바위굴을 너무 사모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저런 굴이 있는 기도원이 있는지를 물었더니, 무척산 굴에서 기도했던 적이 있는 분이 마침 김집사님께 김해 무척산 밖에 없다고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김집사님은 그 추운 12월에 무척산을 찾아왔다. 제일 추워서 다들 싫어하는 방을 달라고 하고서 매일 굴에서 몇 시간씩 기도를 했다.

 

무척산에 온지 10일쯤 지난 후였던 것같다. 참 추운 해였는데 예쁜 여자가 코도 얼어서 빨개지고, 너무 불쌍해 보여 우리 방에서 차 한 잔을 대접하면서 처음으로 말을 붙였다. (나의 냉정하고 쌀쌀 맞은 성격이 큰 기도 제목인데도 잘 안 된다.)

 

김집사님의 모습을 보니 가난하지만 분위기가 있는 여인이라 생각이 들어 파라핀 등잔에 불을 켜고 따끈한 차를 대접했다. 그런데 김집사가 나에게 말했다. "원장님, 이 귀한 초를 켜주세요?" 나는 속으로 '이 초가 비싼 걸아네.' 생각하는데,

 

김집사가 말했다. "이 초가 한국엔 잘 나오지도 않고, 혹시나 나올 땐 굉장히 비싼데……."

 

나는 "네, 전에 홍콩에 갔다가 선물 받았어요. 집사님은 어떻게 이 초를 아세요?" 하니

 

"독일제가 제일 멋있게 타지요."하며 웃었다.

 

그리고 98년도에는 파라핀 초가 많지도 않았고, 중국이나 일본, 영국산도 독일산만큼 깨끗이 타지는 않는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나는 "김집사님! 너무 가난하고 불쌍해 보여서 내가 차 대접했는데, 초를 아는 것 보니 안 불쌍한가봐, 괜히 차를 줬잖아," 했더니 "원장님 제가 그 초를 구해드릴께요." 한다. 나는 '나도 못하는 걸 어디서 구해?' 속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김집사님은 남편에게 전화를 하더니, 초 100개를 즉시 구해서 보내라고 했다. 남편은 즉시 독일에 전화해서 무척산으로 초를 보냈다. 나는 '엄마야..' 놀래 자빠질 뻔했다.

 

내가 너무 귀한 초라서 초를 아끼는 것을 보고, 또 남편에게 전화를 해서 "여기 원장님은 산골에서 고생할 분이 아닌 세련된 분이신데, 오직 예수님 때문에 고생하고 계시니 우리가 작은 위로를 해드려야 되니, 그 초를 100개 더 구해주세요."라고 했다.

 

나는 '저 사람이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일까' 생각했다. 그 뒤로는 수련회 오는 학생들로 너무 바쁘게 지내다보니 별로 대화를 하지 못했다.

 

한번은 내가 설교를 하면서 "고난이 색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면 덜 괴로울텐데 똑같은 고난이 해마다 똑같은 장소에 똑같은 모양으로 오는데 질식할 것 같다. 무척산 기도원을 철거하라는 소리, 국유지에 한 평이 들어갔다는 소리, 곳간, 화장실을 철거하라는 경고장만 보아도 경끼를 하겠다."는 말을 했다.

 

김집사님은 그 말을 듣고서 자기 남편에게 부탁해보자고 했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그 말을 일축해 버렸더니, 김집사님은 "원장님, 우리 남편이 좀 높아요."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오, 그래요." 하고서,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김집사님은 답답했던지, 자기들끼리 의논해서 이사라는 사람과 측량기사를 보냈다. 지금까지는 김해군에서 나와 측량했는데, 이번에 온 측량 기사는 기존과 달리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두 번이나 불하 받은 땅을 세밀히 측량했다. 놀랍게도 몇 년 동안 국유지를 몇평 점유했으니 철거하라고 못살게 굴었던 그 땅이 국유지가 아닌 우리 땅이었다. 아니 오히려 더 남았다. 부분 측량비가 비싸서 엄두도 못 냈던 일이 해결되었다. 우리는 "어이, 김집사 남편이 정말 높은 가봐." 라고 말했다. 전에 임야를 밭으로 바꾸었던 것을 기적적으로 불하받아 주었다.

자동차도 없는 우리는 그 지긋지긋한 양산 영림소에 한 번도 가지 않고 이 큰일이 해결할 수 있었다.

 

김집사님은 송은파가 너무 불쌍하다고 서울 신라 호텔 귀빈석에 우리 아들, 며느리를 초대를 했다. 촌놈이 평생 그런 대접은 처음이었다. 그 날 요리 이름이 "나까소네"였다. 나는 이미 촌놈도 아닌 산골 놈인데 궁금한 것은 물어보자 하여 도대체 나까소네 요리가 무엇인지 물었다.

 

나까소네는 국빈으로 그 사람이 먹는 요리라고 했다. 클린턴이 방문하여 자신이 좋아하는 요리가 나오는데 혹시 나까소네가 즐겨먹던 요리 재료가 남았으면 그 요리를 해준다고 했다. 산골 놈이 평생 그런 요리를 먹어 본 것과 함께 디저트를 만드는 광경에 눈이 현황했다. 외국으로 많이 다녔던 아들에게 "얘, 너 이런 요리 먹어봤니?" 하니까 아들은 "아니요, 나도 평생 처음이에요. 여기 오니까 완전 촌놈이네요."하고 했다.

 

하나님은 위로의 방법이 너무 다양하시다. 그런데 또 무슨 고난을 주시려고 미리 한턱 쓰시는 것인지, 아니면 지난날의 고난이 미안해서 그러시는지 하여간 너무 감사했다.